청장년회 일일 수련회 주제 발표

 
인천 성 바울로 청장년 일일 수련회에서 가졌던 주제발표 "성찬예배" 가 복사로 봉사하고 있는 나타나엘 김도운의 강의 전문이다.

 

성 니콜라스 카바실라스의 성찬예배 주해

 

[성찬예배 주해]에 대한 암브로시오스 조성암 대주교님의 주요 소개 말씀
1322 년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나 1391 년에서 1397 년 사이에 안식하신 성인은 비잔틴 시대의 신학자이자 저술가로서 자신의 삼촌이며 테살로니키의 대주교인 닐로스 카바실라스로부터 처음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철학 공부를 하며 제국의 황제를 포함한 주요 인물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생에 가장 완숙했던 말년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찬예배 주해]의 그리스도교 저작 중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저술하였고 그 중 [성찬예배 주해]는 오늘날까지 그리스어로 수차례 거듭하여 출간될 만큼 이 책을 읽으려는 바람과 요구가 시대를 막론하고 지대했습니다. 또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신학자들과, 성직자, 평신도들까지도 영적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널리 활용하고 있습니다.
인사말
다니엘 대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성찬예배 주해]에 대한 발표를 준비시키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공간의 초월을 통해 놀라운 신비의 성찬 예배에 초청해 손수 집전하시는 예배에 관해 진정한 본질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시고 또 그 예배 안에서
나타나엘 (김도운)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각 부분의 몰랐던 상징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시어 영과 진리안에서, 즉 영성 속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임을 이 책을 완독하고 깨달았습니다.
또한 다니엘 대 신부님의 지극히 감사한 이러한 가르침은 비단 저에게만 주심이 아닐 것이고, 가장 많이 배워야 하기 때문에 발표 준비까지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초대하시는 성찬예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최후의 만찬에 참여하고, 그분의 사역과 수난을 목격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가 그 분 안에 사는 부활을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목적은 신자들의 성화(聖化)입니다.
1. 성찬예배의 의미
성찬예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선물을 준비하는 1준비 전례, 2사도경과 복음경이 봉독되며, 설교가 봉독되는 말씀의 전례, 3영성체가 베풀어지는 성만찬 전례로 이루어집니다.
그 중 성찬예배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축성 행위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이 목적은 신자들의 성화(聖化)인데 신자들은 이런 신비를 통하여 죄를 사함 받고, 하늘나라를 상속받고 또 그와 유사한 영적 보화들을 받게 됩니다.
성만찬 전례 전 거룩한 의식과 표현들이 이 목적을 위해 준비되고 이루어지며 이러한 준비 과정들은 우리들이 모든 것을 받아 간직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요구하시며, 만약 우리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는 우리를 성화의 참여자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성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준비가 필요하고 이러한 준비는 거룩한 예배 순서 안에 기도, 시편, 성가, 성서 봉독 말씀의 전례 등 모든 거룩한 의식과 표현들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준비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1)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그분께 향할 수 있도록 하고, 죄 사함을 가져다주며, 그분의 자비를 우리에게 느끼게 해줍니다.
2) 성서 봉독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불을 지펴주고 자비를 알게 해주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을 우리 마음속에 생기도록 합니다.
3) 시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찬양의 제사를 하느님께 바쳐라 나는 너를 구해줄 것이며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 (시편 50:14-15)
4)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태오 13:3) 라는 말씀으로 이러한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땅을 경작하기 전에는 우리가 먼저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찬예배의 첫 부분은 그리스도 사역의 초반부를, 두번째 부분은 이 일의 계속을, 마지막 부분은 이 일의 그 다음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그분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사신 삶을 바라보게 되며,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행하신 기적의 증인이 되도록 구세주의 삶과 사역의 여러 부분이 조화를 이루며 기념하는 다양한 모습을 우리 앞에 내어 보이십니다.
각각의 행위에는 목적이 있는데, 복음경은 복음 말씀을 봉독하기 위해, 거룩한 선물은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가지는 모두 구세주께서 세상에 나타나심을 상징합니다.
성찬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모두 구세주의 구속 사역과 관련이 있고 그러한 목적은 우리 앞에 하느님의 계획을 펼쳐 보여서 그것을 영적 깊이 바라보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어 우리가 거룩한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구세주의 구속 사역을 통시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주님의 초대에 참여한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더욱 진보하고 거룩해집니다.
모든 것은 성찬예배의 순서 속에서 표현되고 표상되며 우리는 “부요 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신분” (고린토 후 8:9)의 그 가난을, “천상에 계시며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시면서도 지상으로 내려오신 분의 지극한 겸손을”, 절대적으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분께서 우리의 죄의 사함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동안 받으신 조롱과 수난과 고통을 그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마음의 눈으로 진리를 응시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다른 모든 생각들을 몰아내고 관상하면서 “주님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해주소서” 라고 주님의 오른편에서 외쳤던 강도의 말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리스도께 그분의 영광을 비춰야 하겠습니다.
❑진실한 예배에 관한 사도경과 복음경의 말씀 내용
주님은 목요일 밤 최후의 만찬에서 손수 빵과 포도주를 몸과 피로 성화시킨 것과 똑같이 대제사장으로써 성찬예배를 손수 집전하시면서 우리를 만찬에 초대하시었고 우리는 마침내 거룩한 선물을 받아 모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어,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게 되고 이론을 통한 성화에 오감의 예배를 통한 성화를 더하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운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고린토 후 3:18)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요한 4:23-24)
2. 선물을 준비하는 준비 전례
사제에 의해 선별된 빵은 예비 제단에 있는 한 여전히 빵일 뿐이지만 하느님께 선물로 봉헌되었다는 특성이 부여되어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됩니다. 지상에서의 삶의 첫 시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바쳐진 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와 죽음이 구약에서 미리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제는 이미 예표(豫表)와, 묘사로써 빵을 제단으로 가져와 바치기 전에 희생의 상징을 빵에 새기며 이 빵이 참된 빵, 십자가에 달려 희생되신 그리스도로 곧 변하리라는 것을 예견하며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제는 성스러운 부분이 떼어질 빵을 들고서 “우리 주 하느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손에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느님 아버지께 선물처럼 그것을 바치시고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루가 22:19, 고린토전 11:24-25) 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면 교회는 이 예식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성사에 대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의 말씀을 언급하며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고린토전 11:26)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사제는 빵을 자르면서 구약의 예언자가 구세주의 수난에 대해 말한 것, 곧 “그는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처럼 끌려갔다.”(이사야 53:7, 사도행전 8:32)라는 구절을 읊습니다.
그리고 빵을 성창(聖槍)으로 여러 번 찔러서 자르는데, 예언자의 구절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말하면서, 잘린 조각들과 예언자의 구절이 서로 상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그분은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처럼 끌려가셨고......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인간사회에서 끊기셨다.”(이사야 53:7-8) 같은 방법으로 예언서의 나머지 부분을 부언합니다.
사제는 빵을 선반 위에 놓고 나서, 우리 주님의 희생과 죽음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세상에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희생되시도다.” 방식의 형식으로 주님의 희생을 설명하고 빵에 십자가를 새기는데, 이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희생이 이루어 졌음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이며 빵의 오른쪽을 성창으로 찌르고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라고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에 대해 언급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루가 22:19)라고 명하신 그분의 목적을 위해 주님 위에 죽음을 새기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의 은혜를 새기며 죽음에 대한 승리를 실현시킵니다.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손수 하느님께 드려 봉헌되셨고 바쳐졌으며 마침내 스스로 희생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직접 인류 전체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내시며 당신의 몸을 선택하신 후 직접 그 몸을 하느님께 선물로 드리며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라고 말씀 한신 것처럼 죽음을 통해 세상을 벗어나 당신의 길을 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고, 하느님께서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 (이사야 28:16),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이사야 53:10-11)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1우리가 그분의 새로운 생명에 동참하시기를 원하셨고 세례성사를 통해 그분의 죽음을 본떠서 우리의 생명을 바쳐 우리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며,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방법으로 당신의 죽음과 장사에 참여하여 2또 새로운 생명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18-20)
❑거룩한 선물
사제는 봉헌된 빵들 각각으로부터 한 조각을 떼어내서 각각의 조각들을 ‘거룩한 선물’로 만듭니다.
1)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면서
2)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면서
3) 산 이와 죽은 이의 죄 사함을 위해서 등
선물의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와 간청을 드리기 위함이며, 하나는 우리가 이미 받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와, 두번째는 앞으로 은총과 은혜를 받기 위한 청원의 차원의 두가지 의미를 담습니다.
빵은 아직까지 다른 특성 없이 빵으로 남아 있으며 다만 하느님께 봉헌된 것으로써 주님의 어린 시절 몸을 상징합니다. 사제는 ‘아스테리스코스(별십자)’를 빵 위에 놓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때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마침내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오 2:9)와 영원 이전부터 그분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을 낭송하며 성반과 성잔을 값진 ‘아이르’(Aer)로 덮은 후 주변을 골고루 분향합니다.
3. 성찬예배의 시작
성찬예배의 시작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라가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찬미되나이다.” 의 기도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감사, 찬양, 고백, 청원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 가운데 첫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주종 관계로써 종들이 주인에게 다가갈 때 특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처음부터 자신의 문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업적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인 욥기의 이야기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늘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해야 올바른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분의 선하심과 자애로우심에 대해 알게 되고, 이에 당연히 감사가 영광을 뒤따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육화 하심으로 인하여 성 삼위가 선포되고, 인도되며 영광을 드린 사제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립시다” 라고 기도하는 방법을 신도들에게 알려주고 이끌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신도들의 마음이 감사와 고백에 있는 상태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연도(연속되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설령 우리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선하게 대해 주시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의 고백을 통해 그분의 넘치는 선하심과 비교하면서 하느님의 은혜와, 선하심과, 사랑을 인식하며 기도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면서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의롭게 되려거든 먼저 너희의 죄를 고백하라” (이사야 43:26)의 예언자의 말을 따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의롭게 된다면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실까요?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요소인 청원으로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데살로니카 전 5:18) 기도하는 사람만이 평화로운 마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그의 영혼이 감사와 고백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처럼 사제가 신도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이미 평화의 단어 속에 고백과 감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교인들에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이유는 성 사도 야고보가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야고보 5:16)라고 말한 것처럼 사제의 그 간구가 신자들에게 역동적으로 실효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첫번째 청원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리는것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오 6:33)을 구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권고를 듣지 못하고 평화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기도를 통해서 어떤 유익함도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분노심과 슬픔이 영혼을 흐트러뜨리거나 악의가 영혼에서 평화를 쫓는다면 그는 기도를 통해 죄 사함을 얻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더 나아가 어떤 은총도 받지
못할 것이며 또한 동요가 생긴다면 헛되게 기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초대해 주시는 성찬예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은총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방법은 우리가 거룩하게 될 준비를 적절히 갖추었을 때 우리를 거룩하게 해줍니다. 만약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영혼의 상태라면, 우리에게 유익은 고사하고 오히려 큰 해를 입힙니다. 이 은총은 인간의 사악함에 의해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도 청원합니다. “좋은 날씨를 주시고 풍년이 들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공급자로 알고 언제나 그 분만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것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도 하느님께 청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원하는데 하느님께 자비를 청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청원하는 것 과 같습니다.
모든 기도를 마친 후에는 사제는 “지극히 거룩하고, 정결하고,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평생 동정녀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분들처럼 우리 자신과 서로를 그리고 우리의 온 생명을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맡깁시다.” 라고 기도하며 신도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주문합니다. 이것은 말로만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모든 이에게 다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며 하느님 앞에 나가야 하는 담대함과 용기, 깨끗한 양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자신을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때 확실한 믿음으로 우리 자신의 안위를 전적으로 하느님께 맡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와 모든 성인들에게 우리가 온전히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고 믿음의 일치와 성령의 친교를 먼저 간구한 후 우리 자신과 서로를 그리고 우리의 온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게 됩니다.
성령의 친교는 성령의 은총을 의미하는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담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화해시키며 허무시고 (에페소 2:16) 이전에 서로 갈라져 교류를 할 수 없었던 하느님과 인간이,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내려오심으로 다시 교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후 1:4)
4. 안티폰 (응송 또는 성가)
1) 제1안티폰
안티폰은 봉독자가 구약 시편의 귀절을 낭송하면 뒤이어 성가대뿐 아니라 신자들도 함께 찬송하는 것으로 3 부로 되어있는 안티폰의 기도에서 교인들이 기도드리는 바를 하느님께서 받아주시어 이루어 주시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보제가 연도하는 동안 사제는 안티폰의 기도를 드리는데 보제가 없으면 사제는 보제가 하는 모든 것을 하게 됩니다.
먼저 “평화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립시다.”등의 청원 기도를 드리고 교인들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로 답하는 동안 사제는 제단 앞에서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당신의 지극한 자비와 연민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기를 첫번째 안티폰의 기도로서
작은 소리로 드립니다. 1제 1 안티폰의 기도: “주 우리 하느님이시여, 주의 권능은 비할데 없고, 그 영광은 무한 하오며, 주의 자비는 헤아릴 수 없고 자애는 형언할 수 없사오니, 주여, 주의 사랑으로 우리와 이 거룩한 집을 굽어 살피시고, 우리와 또 함께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의 지극한 자비와 은혜를 주소서.”
이 후에는 “모든 영광과 찬미와 경배를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드림이 마땅하나이다.” 라고 삼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후 다윗의 시편 구절들(“내 영혼아 주를 찬미하여라 속으로부터 그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를 찬미하여라 베푸신 모든 은덕 잊지 말아라” 시편 103:1-2) 이 스티호스 1 로부터 선창(先唱)되고, “구세주여 성모님의 중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의 안티폰이 스티호스 1 이후 도돌이표로 후창(後唱)된 후 스티호스 2 로 시편 103:2 가 이어집니다.
교인들이 성가와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스티호스 3: “주께서는 하늘에 옥좌를 차리시고 온 누리를 다스리신다.” 시편 103:19) 지성소 안에서는 사제가 일반적으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빛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집을 사랑하는 이들을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고”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3) 제2안티폰
사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것이나이다.”) 다시 두번째 봉독자의 스티호스와 “내마음의 주를 찬양하여라. 한평생 주를 찬양하여라” (시 146:1,5,10) 함께 성가(“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찬송하나이다......” )와 함께 제 2 안티폰이 시작됩니다.
사제는 함께 기도하는 교인들을 위해 다시 기도를 올리고 교인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 후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간청합니다. 2제 2 안티폰의 기도: “주 우리 하느님이시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아버지의 상속자를 축복하옵소서. 주의 교회를 보호해 주시고, 주의 집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소서. 주의 권세로 이들을 영화롭게 해주시고, 주께 바라는 우리를 저버리지 마옵소서.”
스티호스 2 “야곱의 하느님께 도움받는 사람 자기 하느님 주께 희망을 거는 사람! 복되어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영생하시는 독-생-자 시여......우리를 구원하소서”) 스티호스 3: ”주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니, 시온아, 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영생하시는 독-생-자 시여......우리를 구원하소서”)
연도가 진행된 후 제 3 안티폰이 시작되며 복음경의 입당이 준비됩니다.
4) 제3안티폰
(3제 3 안티폰의 기도: 주는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한마음 한뜻으로 주께 이 기도를 올리게 하시고, 둘이나 셋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드리면, 주님은 그 청을 들어주겠노라고 언약하셨사오니, 지금 주의 종들의 간곡한 애원을 이루어 주시어, 현세에서는 주의 진리를 깨닫고, 후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
기도를 끝낸 사제는 큰소리로 “주는 선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이시니.......”라고 외치는데 이 뜻은 교인들의 애원을 들어주고 또 영원한 생명을 베푸는 그 근원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애하심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5. 소입당
봉독자는 다음의 스티호스(이 날은 주께서 내신 날, 다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시 118:24)를 봉독하면 신도는 (마태오 5:3-12)산상설교 말씀의 구복단 성가 또는 특별 축일 아뽈리띠끼온을 부릅니다.
신도가 찬양하는동안 사제는 복음경을 들고, 성소의 중앙에 서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복음경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 분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신도들 가운에 처음 나타나심을 상징합니다. 복음경 앞에 촛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을 가지고 오신 것을 상징합니다.
4입당기도: “주 우리 하느님이시여, 주는 하늘의 천사와 대천사의 품계와 군대를 세우시어, 주의 영광을 받들게 하셨사오니,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같이 입당하여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주의 선하심에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모든 영광과
찬미와 경배가 주의 것이오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있나이다.”)
사제가 이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모든 영광과 찬미와 경배가 다 하느님 것이어서 인간과 천사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
성가가 끝나면 사제는 성당 중앙, 지성소 앞에서 교인들이 볼 수 있도록 복음경을 높이 들어올리며 “지혜로우니, 경건한 마음으로 일어설지어다.”라고 외칩니다. 복음경은 주님을 상징하고
복음경이 신도들 한가운데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중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신 주님의 현현을 상징합니다. 이제 예언되신 분이 나타나서 당신을 분명하게 알리셨으니 이제부터는 복음경의 등장으로 예언자들의 구절은 그치고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나 다른 성인들을 찬양하거나, 지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겪고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 당신을 찬양합니다.
(“모두 까까이와서 그리스도께 경배합시다.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찬송하나이다 알릴루이야”)
이어서 성당 아빨로띠끼온과 축일 아뽈리띠끼온을 부르는 동안 사제는 작은 소리로 지성소 안에서 삼성송 기도를 드립니다. 신도는 삼성송(“거룩하신 하느님이여......”)를 부르며 구세주의 현현으로 드러난 성 삼위 하느님을 삼성송으로써 찬양하게 됩니다.
삼성송은 “거룩한 하느님이여, 거룩하고 전능하신이여, 거룩하고 영원하신이여”의 천사들의 찬양인데 이사야서 6 장 3 절에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라고 언급한 부분과 요한의 묵시록 4 장 8 절에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 라고 언급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성송이 끝난 후 사제는 다시 교인들에게 “주의 깊게 들읍시다.”라고 외치며,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서 있지 말고 지금 행해지고 불리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우리가 신비 성사에 전념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적인 정욕 없이 믿음으로 충만하고 경건한 이들이 예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와 말들을 주의 깊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여 짧은 단어를 통해 그 속에 담겨있는 모든 의미를 상세히 상기시켜주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는 고귀한 선물이 거룩한 제단으로 옮겨질 때 부르는 ‘헤루빔성가’ “세상의 온갖 걱정을 물리칠지어다.”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표현됩니다.
우리가 예배시간 동안 무기력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온갖 신경을 모아 집중하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며 경외심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성찬 예배 속에서 우리가 보고 말하고 듣고 느끼고 맡고 맛보는 모든 것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의 자세이며 온 신경은 주인을 향해 있고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탄원자의 자세이자, 섬김의 책임이 가지는 의미일 것입니다.
6. 성서봉독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후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사도경 봉독(또는 사도행전) 이 이루어진 후에 그 뒤를 이어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가 (“알릴루이야”)가 이어지고 난 후 복음경 봉독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처음에 주님을 드러내셨고 주님은 침묵하셨던, 그때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증언할 다른 목소리가 필요했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오 3:14, 요한 1:29-34) 이제 복음경 봉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대중과 섞이시며 당신이 누구인지를 완전히 드러내셨으며, 사도들을 통해 가르쳐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감춰져 있는 것들을 서서히 드러내 보여주심으로써 사도경이 먼저 봉독되고 마치 동방박사들이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영광 드렸었던 것과 같이, 간청의 성격이 없고 찬양의 성격만 있는 천사들의 성가 ‘알릴루이야’가 찬양되고, 마지막에서야 복음전 기도를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의 복음을 깨닫게 하고, 말씀을 지키고, 모든 욕망을 이기고, 영적인 삶을 살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한 후 복음경을 봉독하게 됩니다.
복음경을 읽은 뒤에 사제는 그 날 읽은 사도경이나 복음에 관하여 강론합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는 모든 성인들과, 교회를 이끄는 목자들과, 지도자들, 죽은 이들과 산 이들, 예비교인들을 위한 기도, 모든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든 교회와 성당에 유익을 주는 이들을 위한 기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7 희생제사
1) 대입당
희생 제사는 원칙상 전통적으로 비 입교자(예비 교인)는 참여할 수 없어서 세례성사를 통해 완전해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 후 밖으로 내보냈지만 오늘날에는 이 관습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는 교인들과 함께 큰 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 후 주의 거룩한 제단 앞에 설수 있게 해주시고 언제나 깨끗한 양심으로 피 흘림이 없는 희생 제사를 바치기에 합당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드립니다. 한편으로는 단죄와 수치를 당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양심으로 거룩한 제단에 설 수 있도록 간구하고, (고린토 후 7:1)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함께 기도하는 교인들이 단죄나 죄의식 없이 거룩한 신비의 참여자가 되어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고린토 전 10:31)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에 있어 나의 영광보다 하느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우리는 종으로서 하느님을 이렇게 섬겨야 할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하는 것을 어느 곳에서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 찬양, 간청, 예비자 교육, 권면, 봉사 등 각종 거룩한 행위들입니다.
사제는 큰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예비제단으로 와서 거룩한 선물을 경건하게 머리 위로 듭니다. 그리고 지성소에서 나와 대입당이 시작되는데 교인들을 지나쳐 성당의 중심부로 천천히 엄숙하게 걸어갑니다. 사제가 거룩한 선물을 봉헌할 때 교인들은 자신들을 주님의 오른편에서 주님의 죄 없음을 말하고 “주님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해주소서” 라고 외쳤던 강도처럼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대입당은 주님께서 골고다로 향해 가시는 것을 나타내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줍니다.
이는 실제적인 필요로 이루어지는데 거룩한 선물을 들고 성당 안을 행렬하는 것은 주님의 마지막 현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강렬한 희생만큼 우리를 확실히 구원해 달라고 할 수 있는 탄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그 선물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여기고 경배한다면 그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곧 성찬예배와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대입당 때의 신자들
곁을 지나는 선물은 아직 축성되지 않은, 미리 선택받은 즉 완전한 희생이 이루어 지지 않은 봉헌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거룩한 선물을 제단 위에 내려놓고 희생 제사의 시간이 가까이 왔으며 예식에 합당하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데 더욱 전념합니다. 그는 자신을 정화하고, 그 예식을 거행하기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준비시킵니다. 또한 그곳에
참여한 교인도 질서 정연하게 준비시키며 기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용서, 신앙고백(신조)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춥니다.
이 세가지 즉 기도, 사랑, 신앙 고백은 주님께서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마태오 24:44)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써 믿음은 신조의 고백으로 드러나고, 행위는 사랑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선의 종착역이며 모든 덕을 포함합니다. 또 사제는 우리에게 “존귀한 예물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드립시다” 라고 거룩한 선물이 축성될 수 있도록 우리의 첫 목표가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소망하는 간청의 기도를
권유합니다. 그리고 온 생명을 주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맡기자고 권유한 후, 하느님께 올리던 기도의 마지막을 큰 소리로 외치며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지극히 거룩하고 생명을 베푸시는 성령과 함께 영원히 찬양되시는 하느님 아버지시여, 당신의 외아들의 자비를 믿고 이 모든 기도를 드리나이다.”)
사제는 교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교인들 간에도 서로 사랑한 것을 촉구하는데 이는 야고보 서신에”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야고보 5:16)라고 나와 있듯, 사도적 명령이기도 합니다.
교인들은 “모든이에게 평화” 라고 기원해주는 사제에게 “또한 사제에게도” 라고 응답하며 그에게도 똑 같은 평화를 빌어줍니다.
2) 신앙고백
사제는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촉구하고, 곧이어 한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기 위한 것이 그 이유임을 밝힙니다. (“서로 사랑하고 한 마음으로 믿고 고백합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 지혜로 전해진다는 것을, 지혜로 임해지고 나아가야 함을 말해주며 “문과 문, 지혜로 임합시다.”라고 외치면 교인들은 이 외침에 응답하여 ‘신앙의 신조’를 낭송합니다. 이것은 이단들의 교리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조금 전 고백한 그 믿음으로 굳건히 서야 하고 믿음의 영혼에 있어서 자그마한 의심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그래서 커다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성당의 문을 경계하여 다른 마음을 품은 이들이 함부로 성당에 들어와 신성한 예배 분위기를 망치지 않도록 하며 기독교 박해가 잦던 시대에 교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삽입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굳건한 믿음으로 서 있을 때 하느님께 거룩한 선물을 바치는 우리의 봉헌은 온당한 봉헌이 되며 온당한 봉헌이란 평화로운 가운데 봉헌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주의 깊게 참례하여 거룩한 봉헌의 제물을 평화로운 가운데 드립시다.”라고 하며 주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 5:23-24) 라고 명하셨습니다.
사제의 외침에 교인들은 “평화의 은혜와 찬양의 제사로다.” 라고 응답합니다.
교인들의 응답이 끝나면 사제는 그 무엇보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성스러운 것을 그들에게 빌어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리이다.” (고린토 후 13:13) ←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주님이 바라는 성찬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신자들 역시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라는 그 가르침에 따라 사제에게 똑 같은 것을 빌어줍니다.
우리는 이 기원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성 삼위의 각 위격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데, 성자 아들로부터 은총을, 성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성령으로부터 친교를 받습니다.
교인들을 위한 사제의 기원은 그들을 하느님의 축복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어 주며 사제는 교인들의 영혼을 지상에서 높이 들어 올린 후에 “마음을 드높입시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주님을 바라보는 생각과 마음을 높은 곳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자” (골로사이 3:2)의 가르침과 합치합니다. 다시 말해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 (마태오 6:21)라는 가르침처럼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의 오른편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최후의
만찬 때 성찬의 신비로운 성사를 제정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것과 같이 우리도 선물을 축성하기에 앞서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온갖 은혜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림이 마땅하다고 감사를 드림으로써 혼신을 다해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부터 가장 중요한 봉헌 기도가 시작되는데 이 시간부터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뇌면서 하느님 외아들의 거룩한 말씀이 본인 앞에 놓인 선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 기도하고 간청합니다. 그리하여 그 선물이 지극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당신의 성령으로 변화되어 빵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이,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흠 없는 피가 되도록 간구합니다.
이 모든 기도와 말씀이 끝나고 나면 이 성스러운 의식은 끝나고, 완성되고 선물은 축성되며 이 빵은 더 이상 주님의 몸을 예견한 형상이 아니며, 참된 선물을 상징했던 선물도 아니고, 구원을 위한 수난의 재현도 아니며, 참된 선물 바로 그 자체. 즉 실존입니다.
사제가 봉헌기도를 드리는 동안 신도들은 거룩한 성가를 부르고 사제는 주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명령을 계명이자 믿음의 근거로서 신도들에게 상기시킵니다.
3) 신비에 대한 믿음의 근거
주님께서 몸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오 26:26, 마르코 14:22, 루가 22:19)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예식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으며,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교회가 이것을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 루가(22:19, 고린토전 11:25) 만일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이것을 행할 능력을 주실 의향이 없으셨다면 애초에 이 지시를 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능력은 바로 사도들을 무장시킨 성령으로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가 24:49, 사도행전 1:8) 이것은 성령의 강림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며 구세주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태오 28:20)
위로자 성령께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반면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고 또 그 본성을 영원히 가지고 계실 것이기 때문에 놀라운 성사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은 진리의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드릴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1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제의 권능이란 바로 이런 것이고, 이분이 바로 사제이시며 성서는 그분을 향해 “당신은 영원한 사제입니다.”(시편 110:4, 히브리 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사제의 권능을 이어받은 하나이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사제의 기도에 따라 예배가 이루어진다면 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빵의 희생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희생은 상징적 죽임이 아니라 실제적인 죽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희생의 주제는 우리가 깊이 살펴봐야 할 하나의 화두인데 이 주제는 그저 비유적인 희생이나 상징적인 피 흘림이 아닌 실제적인 죽임과 희생을 다루는 것이기에 희생되는 것이 빵인지 주님의 몸인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선물은 언제 희생되는 것인지, 축성 이전인지 아니면 축성 이후 인지 등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 빵이 희생되는 것이라면 빵이 희생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주님의 몸이 희생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매 성찬예배때마다 희생되신다면 그분은 매일 돌아가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미 썩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사불멸의 몸(로마 6:9)가
되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십자가형을 집행해야 할 집행인을 불러야 하고 희생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희생은 빵이 축성 되기 전이나 그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성 되는 그 순간, 그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물의 축성의 신비에 관련한 우리의 이 믿음은 꼭 지켜져야 하며 빵의 희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당신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의 희생이라는 점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희생은 그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참된 희생이라는 것과 희생된 것은 빵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 양의 희생은 하나이며 오직 단 한 번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즉 (1)희생되지 않은 빵이 (2)희생됨으로 변했고 (3)그 순간 성령의 감화를 간청하여 성령이 내려와 감화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신비의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주님의 몸으로 많은 봉헌물이 바쳐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사제는 이 신비의 기적을 위해 그리스도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과 고귀한 피가 되도록 기도하고 이것을 모시는 자들이 단죄 받지 않고 영혼의 정결과 죄의 사함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모든 사도들과 성인들의 중보로 교회를 위하여 힘써온 성도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도와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신도들은 감사의 찬양을 하며 각자 자기가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사제가 드리는 기도 일부를 살펴보면 “성 사도들과 오늘을 축일로 지내는 성인과 모든 성인들의 기원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느님께 중보하고 전 세계를 위하여,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위하여, 정결하고, 영예로운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위하여, 살아있는 교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기도를 올립니다.”
사제는 모든 이들을 위해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를 다 드린 후에 자신 또한 거룩한 선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그 거룩함은 죄의 사함으로 이것이 바로 선물이 우리에게 주는 은총이며 “이는 너희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떼어내는 내
몸이니라.”(마태오 26:28, 고린토 전 11:24)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이 완성되면 사제는 어린 양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그분을 중보자로 모시면서, 또 성령을 협력자로 모시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간구를 알리고 선하고 확실한 소망으로 청원합니다. 또한 선물을 봉헌하며 그것을 받아달라고 간구했던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청원합니다. 특별히 죽은 이들에게는 영혼의 안식을 주시고, 그들이 덕의 완성에 이른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지극히 거룩하시고 정결하시며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평생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감사와 기원을 드리고 교회가 구하고자 했던 것을 성인들과 같이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청원의 기도를 드리고 성가대는 성모송을 이어 갑니다.
사제는 선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도록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끗한 양심으로 성스럽고 영적인 이 제단에서 행해지는 천상의 성찬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사제는 위의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교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주고 선을 고취시키며 그들이 자신과 함께 떳떳하고 단죄됨이 없이 용기 내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 드립니다.
아버지라고 합당한자가 되도록 요청하는 사제의 기도로 주님이 순수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모든 신도들이 기도하고 봉독을 끝내면 사제는 큰소리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것이나이다.”라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기도를 마무리하고 모든 이에게 평화를 빌어 줍니다.
8. 성스러운 만찬
사제는 교인들에게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그들의 주님과 주관자로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고 종의 심정으로 그분께 머리를 숙여 그분이 자신들의 주인임을 고백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선물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요한 16:23)라는 구세주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청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외아들의 이름과 은총과 자비를 언급합니다.
이후에 사제는 낮은 소리로 대사제이시며, 성체이신 분께서 당신 손으로 직접 사제와 모든 교인에게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성체성혈을 영하기 위한 기도)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
몸과 피는 거룩한 이들에게 합당
하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즉 거룩한 분은
주님 한 분이며 그분을 영접할 합당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받아 모시는 것이 허용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완전한 덕에 이른 사람. 즉 주님을 말하지만 주님과 닮은 사람에 이르려고 투쟁하는 사람들도 가리킵니다. 완성에 이르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은 성사에 참여하고 거룩해지는 것에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생명을 얻고 성화됩니다. 만약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그분의 온전한 몸에서 분리되거나 잘려서 떨어져 나온다면 우리가 거룩한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나를 너희로부터 떼어낸 것은 바로 너희의 죄이다. “(이사야 59:2)
그분은 세례와, 성체성혈 성사를 통해 우리 안에 함께 계시며 우리는 그 거룩함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사제는 교인들이 성스러운 만찬에 함께 참여할 것을 독려한 후에 먼저 자신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이것에 앞서 뜨거운 물(제온)을 축복하고 성작 안에 붓는데, 이는 성령께서 교회에 내려오심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구세주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었을 때 사도들에게 뜨거운 불처럼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 사역은 화폭 위에 그려진 것처럼 성찬 예배 속에서 재현되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죽음으로 나아가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는 그 분을 시각적으로 보았으며 그런 후에는 봉헌된 빵이 수많은 수난을 겪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결과도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고 한 사람 한사람은 그 지체입니다. (고린토전 12:27)
사제는 성작을 높이 들어 주님의 부활을 보여주며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고자 하는 이들이 “하느님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믿음과 사랑으로” 가까이 오도록 초대합니다. 즉 사제의 초대는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경시하지 말고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의 대상에 대해 주저하거나 의심을 품지 말며, 이 성사가 그것을 받아 모시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러한 믿음으로 나오는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경건함과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 속에 감춰져 있는 예수님의 신성에 경배하고 영광 돌리며 그 신성을 선포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온다면 너희는 그를 맞아들일 것이다.”
(요한 5:43)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합당하신 주님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도망치는 종의 특징은 무례함과 반란입니다.
사제와 모든 신도들은 영성체 할 때 자신은 가장 큰 죄인임을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피해 주님께로 가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거룩한 피로 씻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 영성체 하는 것입니다.
사전에 죄가 있음을 느낄 때에는 고백 성사로 준비한 다음에 영성체하지만 영성체는 죄가 없고 합당 해서가 아니라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죄인임이 인식되기 때문에 성체와 성혈로 주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한 분은 주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9. 감사와 영광
신도들도 성체성혈에 임하기 위한 기도를 드린 후, 성가대가 영성체송(끼니니콘)을 찬양하는 동안 경건한 마음과 믿음과 사랑으로 차례대로 주님께 다가서서 성체성혈을 영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성체성혈을 마치면 사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축복하고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어서 교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축성이 그분의 도움으로 그들 안에 머물러 있으며 자신들이 은총을 배반하지 않고 받은 선물을 잃지 않도록 바라면서 성가를 계속 부릅니다.
온갖 좋은 것을 베푸신 자애로우신 주님께 성체성혈을 허락해 주신 감사의 기도가 계속되고 사제는 “우리를 축성해 주시니 다시 한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또 영원히 영광을 드리며 우리의 온 생명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주님께 기도드리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헤어집시다.” 하고 신도들에게 외칩니다.
사제는 성소에서 내려와 예수님 성상 앞에서 다시 한번 많은 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기도하며 감사와 경배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어서 시비의 성사에 참례함을 합당케 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성가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성가를 부르거나 축일 아뽈리띠끼온을 부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와 성인들의 중보 기도로써 폐식사를 진행하며 신성한 라뚜르기아인 성찬 예배가 마무리됩니다.
성체 성혈의 은총을 받지 못한 예비 신도들은 대신 축복된 빵(안티도론)을 위안물로 받습니다. 그리고 성체성혈을 영한 사람은 성체성혈을 받은 후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충만하게 살고 평안을 누리려면 그분과 끊임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빛이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없이는 영혼에 참된 생명과 평화가 깃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중재자이시기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단 한 번만 중재자로 나서서 당신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모든 것을 중단하신 것이 아니라 늘 언제나 우리를 중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당신 자신과 결합시키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과 하느님의 은혜에 동참하여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직 거듭나지 않았거나 다시 거듭나 그리스도를 모셨지만 그 결합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그 분은 하느님의 축복에서 점점 멀어지고 은혜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류를 화해시키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성체성혈의 축성은 영혼속에서 이루어지기 떄문에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고린토전 6:17)
만일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러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축성을 받는 것이 절대 불가능 합니다.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러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 수 있음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는 그의 영혼이 성사에 꼭 필요한 선한 마음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식사 초대를 무시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여러 복음서에서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얼마 뒤에 종이 돌아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루가 14:16-24)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복음 6:53-58)
10. 맺는말
세례성사를 통해 과거의 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났지만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현재 처해진 환경에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죄를 짓습니다. 그때마다 자비로운 주님은
저를 주님의 나라인 성당으로 초대해 주시어 저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믿음에 실천이 없고 죄가 반복된다면 제 마음의 수호천사도 떠나가 버리고 성령의 은총도 사라지실 것입니다.
가끔은 성서를 읽을 때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일을 할 때에 저 스스로 하고 싶어서 솔선수범하며 찾아서 하는 중에도 악마가 찾아와 나쁜 마음을 심어주고 가며 방해를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것은 제가 성찬 예배 전날에 드려야 하는 저녁 기도와 성체성혈을 받기 전, 후 기도의 소홀함, 아침 기도와 식사 시 기도할 때에 경건하지 못했던 태도에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에 대해서 반성하며 우리 소 기도서를 늘 챙겨 기도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책을 두 번 완독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많이 불충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릴 때에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보존하고 온 정신을 다해 거룩한 말씀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주의 깊게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다른 모든 생각들을 몰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신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예수 기도를 통해 언젠가는 정념을 배제하여 고요하고 거룩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외에는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누구도 남이나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또 다른 옛 형제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교회의 신앙과 성찬 예배가 다른 어느 곳 보다도 성서의 말씀을 가장 잘 따르고, 지키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었고 저의 믿음이 역시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어 하나하나에 미묘한 것 조차도, 문장 하나하나에 심오한 뜻이 전통과 전승과 더불어 우리의 성찬 예배 안에는 주님의 가르침들과 성서 안에서의 말씀들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특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이 초대해 주는 게로의 시공간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끝으로 다니엘 대 신부님이 저에게 성인이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설명한 우리 교회의 성찬 예배 주해서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대단히 영광스럽고 감사히 생각합니다. 또한 모든 분들에게 성령의 축복과 평화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