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1. 정교회와의 인연

기록에 의하면 정교회와 우리 민족과의 만남은 약 8백년 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몽골 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시대에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몽골의 왕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히 대접했으며 그 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케 했으니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왕전(王佺) 등의 귀족 자제와도 화친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러시아 정교회와의 만남은 2백 60년전 조선 영조시대로 소급됩니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의 문견사건(聞見事件)에는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大鼻獺子)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곧 코 큰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미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들과 교분을 이루며 공어포와 인삼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우리 사신들에게 거울과 주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거울의 옛 우리말 이름은 '어르쇠'입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그 무렵 아라사(러시아를 지칭하던 옛 우리말) 정교회 선교사로부터 입수한 물건들의 이름을 확실히 몰라 그냥 아라사라 불렀던 것이 후에 아르쇠로, 다시 어르쇠로 변음되어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합니다.

러시아 정교회 10차 선교회의 책임자였던 이아킨프는 조선 사신들과의 깊은 교류로 조선왕국에 대한 러시아 최초의 논문까지 써서 남겼다고 합니다.

한편, 조선 말기인 19세기에 적지않은 조선인들이 궁핍과 기아를 피해 이미 조·러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정착하여 체류하기 시작하였는데 러시아는 이들에 대하여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 당국의 동화 정책으로 다수의 조선인들이 정교회 세례를 받기는 하였으나 그 동기가 내면적인 회심에 있었다기 보다는 러시아 체류와 생계 유지를 위한 통과의례적인 측면이 강하였기 때문에 진정으로 정교회의 신앙생활이 러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내면화하기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상 정교회가 이 땅에 본격적으로 선교되기 이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과 정교회의 역사적 만남의 장면들을 잠시나마 살펴 보았는데, 특히 조선말 연해주를 중심으로 우리 민초(民草)들과 정교회의 만남은 이전의 일부 상류계급에 국한되었던 정교회와의 간헐적인 교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세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 중에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러한 신앙의 맥이 지난 80여년 간의 공산주의에 의한 우리 민족과 정교회 신앙의 박해 속에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 내려 와 현재도 러시아 사할린 등에 다수의 한국인 정교회 신자들이 분포해 있고, 몇 분의 한국계 신부님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목하고 계십니다.


2. 선교의 시작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때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120여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30여명의 러시아 국적 소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일과 축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 함께 모여 그들끼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했으나 성사를 축으로 한 신앙 생활이 일상 생활이었던 그들에게는 그때까지 그들을 위해 성사를 집전해 줄 정교회 사제가 조선에는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제가 없었으므로 태어나는 자녀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어 줄 수가 없었고 신자들은 성체 성혈 성사를 받을 수 없었으며 안식한 사람의 장례식이 거행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불랴노프스키는 위와 같은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의 긴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침내 1897년 1월 3일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하였고, 불랴노프스키 공사의 사제 파송 요청을 받은 러시아 정교회 공의회는 1897년 7월 공의회 결정 2195호로 소규모 선교단을 조선에 파견키로 의결하고 신학 박사였던 암브로시오스 구드꼬 수사 대신부와 니콜라이 알렉시예프 보제와 봉독자 A. 니콜라신을 정교회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그들은 성당에 안치할 물건들과 성사에 사용되는 성물(聖物)들을 확보한 후 1898년 초에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친러파가 몰락되었던 조선의 어지러운 정세는 그들의 입국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입국이 저지된 그들은 오랫동안 입국 허가를 기다리다가 결국 암브로시오스 수사 대신부와 니콜라신 봉독자는 귀국하였고 니콜라이 보제만이 계속 블라디보스톡의 한.러 국경지대에서 대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니콜라이 보제는 1899년 중순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고 상 페테르부르그에서 보낸 성물(聖物)들을 가지고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니콜라이 보제는 서울에 도착한 즉시로 러시아정교회 공의회에 상황 보고를 하였고 사제를 다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까잔 신학대학 출신이며 신학 박사였던 흐리산토스 쉐헷트콥스키 수사 대신부를 정교회 조선 선교의 책임자로 새로이 임명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요나 레프첸코를 봉독자로 임명 파견하여 그들은 1900년 1월초에 서울에 입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성당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독실한 신자였던 당시 러시아 공사는 자신의 관저 중에서 가장 큰 방 하나를 임시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고 그 방은 약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시 소성당으로 꾸며져 1900년 2월 17일 성수로 축성된 후 그 장소에서 이 땅에서의 첫 성찬예배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날 성찬예배에는 정교 신자들 외에도 한국 정부의 대표와 많은 주한 외국인들이 참석하여 이 날을 경축하였습니다. 이렇게 성 테오도로스 대순교자의 축일이기도 한 2월 17일은 이 땅에서의 첫 성찬예배를 통하여 한국에 정교회가 세워진 역사적인 날이 된 것입니다.


3. 한국에 세워진 첫 정교회 성당

초대 선교 사제로 부임한 흐리산토스 수사 대신부는 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됨에 따라 그들을 모아 놓고 교리 학습을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한국인들에게 필수적인 한국어로 된 교리서와 예식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중국 북경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 북경 선교 책임자인 이노켄티 피그로프스키 수사 대신부에게 요청하여 중국어판 정교 서적 일체를 입수한 후, 국내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글판 예식서와 니케아신경, 십계명 등의 교리들을 번역해 냈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새로운 신자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공사관에 마련했던 임시 소성당으로는 증가하는 신자 전부를 수용하기에 점차 협소해갔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경향신문이 위치하고 있는 서울 정동 22번지에 대성당을 짓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증가하는 새로운 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소성당이 먼저 신축되었고 흐리산토스 신부가 1903년 4월 17일 신축된 소성당을 축성함으로써, 비록 대성당 건랍에 앞선 소규모의 성당이었지만 이 땅에서의 첫번째 정교회 성당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 성 니콜라이 성당은 1967년 현재의 마포 아현동으로 성당을 이전하기까지 한국에서의 정교 활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당시 성 니콜라이 성당은 고종 황제께서 기증한 부지(현 정동 22번지) 위에 건립되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여섯 개의 크고 작은 종에서 울려 퍼지는 특이한 종소리는 장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장차 그 부지 위에 세워 질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을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본래 소성당에 이어 지어질 예정이었던 대성당은 1094년의 러·일전쟁과 1917년 예기치 않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따른 주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부에 대한 지원 약화로 인하여 결국 정동에서는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4. 선교의 고비와 확장

1903년 교회는 현지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문산에 초가 한 채를 구입하고 정교회 공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공소의 큰방은 예배와 교리 학습에 사용되었고 작은 방은 성직자의 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정기적으로 내려 온 사제나 보제는 현지인 공소회장(카레히자토르)의 협조를 받으며 이 공소를 중심으로 하여 선교 활동을 확장해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몇 사람밖에 안 되었던 한국인 신자들은 신앙의 뿌리도 채 내리지 못한 채 목자를 잃은 양떼가 되어 빈 성당 주변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6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국내 정세가 다소 안정됨에 따라 고종 황제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의 재입국을 허용하여, 파벨 이바노브스키 수사 대신부와 블라디미르 스크리잘리 수사 신부, 바르톨로메오 셀레즈노프 보제 그리고 봉독자를 포함한 4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러시아 정교회 제 3 차 한국 선교단이 동년 8월 14일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적대 행위는 끊이지 않아 선교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파벨 수사 대신부는 매일 예배 의식을 거행하며 서울 외곽 지역까지 선교 활동을 넓혀 나아갔습니다. 교리 공부는 일본 관헌의 감시 하에서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교습 받은 제 1기생 중에서 나중에 국내에서 첫 한국인 사제가 된 요한 강 탁 신부가 나왔습니다.

파벨 수사 대신부는 전임자의 변역사업도 계승하여 성찬 예배서를 보충 완성시켰고, 또 한편으로는 곳곳에 일반 교육을 위한 학교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912년 주교로 서품 되어 블라디보스톡 대주교구 소속 우수리 주교로 임명되기까지 7개의 학교에 220명의 학생을 두고 있었고 9개의 교회 공소를 설립하여 요한 강탁 신부와 함께 교리를 가르치며 남자 192명과 여자 13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정교회에 입교시켰습니다.

물론 이상의 성과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미약하게 보일 지 모르겠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 진행되는 교리공부 등 당시의 제반 상황을 짐작해 볼 때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파벨 수사 대신부는 한국을 떠나 주교로 서품되고 블라디보스톡 대주교의 보좌 주교로 러시아에 체류하면서도,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인한 혼란과 교회 탄압의 와중인 1919-1920년 사이에 별세하기까지 한국 교회에 지대한 관심과 영적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 한국 선교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 그의 왕국에서 고난 중에 안식한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시리이다!

 

5. 일제 시대와 교회의 고난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노골화되었습니다. 교회에 출입하는 청년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연행되어 구타 당하며 취조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빠벨 주교가 귀국하였던 1912년 요한 강 탁 신부가 동경 세르게이 대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한국 교회에서 봉직한 성직자는 러시아 성직자로서 이리나르흐 쉐마노프스키 수사 대신부, 팔라디 셀레트스키 수사 신부, 페오도시 페레발로프 수사 대신부 이상 세 분과 한국인 성직자로서 앞서 이야기했던 요한 강 탁 신부, 루가 김희준 신부, 알렉세이 김의한 보제 이상 세 분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선교된 한국 정교회는 처음에 1897년부터 1908년까지는 페테르부르그 대주교구에 속해 있다가 1908년부터 1923년까지는 블라디보스톡 대주교구에, 그리고 1923년이후 일본 대주교구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교회 탄압이 시작되자 한국 교회는 러시아의 혼란으로부터 유발될 수 있는 국내 미등기 재산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1925년 교회는 교회의 재산권을 당시 법인으로 인정받았던「일본정교회 재산 협회」명의로 등기하였는데, 이 선택이 화근이 되어 교회 재산은 해방후 수립된 한국 정부로부터 일본 법인 소유의 적성 재산으로 취급받게 되었고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 시대는 이제 갓 싹트기 시작했던 한국 정교회에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선교회의 존폐 위협 등 여러 난관을 힘겹게 헤쳐나가는 고난의 시기였던 것입니다.

 

6. 한국 전쟁과 새로운 시도

1945년 해방 이후 국내에서의 마지막 러시아 선교사였던 폴리카르포스 신부가 떠나고 난 뒤에 일제 시대 동안 위축되었던 교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세 번째 한국 신부이고 당시 유일한 사제였던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7월 공산군에 의해 납치 당하였고, 당시 정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은 소련 공산당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으로 감옥에 투옥 당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 그의 왕국에서 주님의 포도원을 돌보다 납북당한 하느님의 종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를 영원히 기억하시리이다!

그리고 3년의 전쟁으로 성당은 파손되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한국 정교회는 그 존폐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한국정교회는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리스 종군 사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안드레아스 할끼오뿔로스 신부가 중심이 되어 전쟁 중에 흩어졌던 신자들을 다시 모으고 성당을 재건하여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11월 29일 성당 복구 성수식을 거행하였던 것입니다.

1954년 안드레아스 신부는 귀국에 앞서 일본 동경 대주교에게 한국 신도들이 천거한 보리스 문이춘 신부의 사제 서품을 요청하여 납치당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뒤를 이어 한국 정교회를 사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부터 거듭되어 온 고난의 역사는 교회에 많은 문제점들을 남겨 놓았는데, 한국정교회는 한국전쟁의 상처를 벗어나자마자 선교의 재개 뿐만 아니라 해방후 적성 재산으로 분류되어 국가재산으로 귀속 처리되었던 교회의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회복해야 하는 문제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교회의 당면 과제들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1959년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그 후 약 7년간에 걸친 소송은 1965년 교회의 승소판결로 끝나 교회는 잃었던 재산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재판으로 교회의 기본 재산은 소유권이 회복되었지만 교회 재정은 최악의 상태로 이르러 부득이 1966년 성 니콜라스 성당의 정동 부지를 문화방송국에 매각하고 현재의 위치(마포구 아현동 424-1)로 이전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교회는 성 니콜라스 성당 신도 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해방후 모교회(母敎會)의 영적 지도와 선교 지원을 더 이상 바라기 힘든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구로 관할 소속을 이전하기로 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님께 탄원하였는데, 당시 한국 신자들의 그러한 탄원이 총대주교님으로부터 받아 들여져서 한국 정교회의 관할 소속이 러시아 정교회 소속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구에 속해 있는 미국 대주교구 소속을 거쳐 1970년 이후부터는 뉴질랜드 대주교구 소속으로 이전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납북 이후 어려운 교회 문제를 처리해 오던 보리스 문이춘 대신부는 건강상 이유로 당시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이었던 성 니콜라스 성당의 주임사제의 직무에서 은퇴함으로서 1975년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수사 대신부가 한국 선교 책임자 및 성 니콜라스 성당의 주임사제로 부임되어 왔습니다.

새로 부임한 소티리오스 수사 대신부는 정동에서 이전후 현재 성당의 미비한 시설물과 전쟁때 파손된 종각을 증축하는 등 성당 내부 시설을 완비하고 그동안 부족했던 교회 예배서와 기초교리 책 등, 선교에 필요한 사항들을 준비하여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 정교회는 우선 내부적인 과제를 해결하고, 1980년부터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총과 선교 노력의 결실로 1980년 이후 각 지역에 순차적으로 성당이 건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교회 성직자와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이 설립되는 등 한국정교회 선교사에 있어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여러 분야에서 성장해갔습니다.

이에 따라 1995년 세계 총대주교청 시노드에서는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한국정교회 교구 헌장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앞선 1993년 그동안 한국 선교의 확장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던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수사 대신부를 주교로 서품하여 현재 한국정교회 교구장이신 디오니시오스 뉴질랜드의 대주교님의 보좌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이제 한국정교회는 오랜 기간의 고난과 어려움을 거친 후에 이 땅에서 교회의 기틀을 다지고, 그 토대 위에 정교회가 온전히 보존해 온 복음과 초대 교회의 정신, 모든 민족 고유의 문화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는 정교회의 선교적 유산, 그리고 정교회의 바른 전승을 통해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 정교회 영성생활”의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작은 봉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본의 산업화 과정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에게 사회복지 사업과 특수교육 및 출판, 장학사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실천적 사랑에 동참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 민족에게 증거해갈 것입니다.


주 우리 하느님이시여!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고 당신의 손으로 심으신 이 포도원으로 오셔서 자라게 하소서!


7. 성 바울로 성당 소개

▶ 주임사제: 다니엘 나창규 수석사제

       약력: 1980년 5월 Holy Cross Theological School 신학과 이수(M. Div. Degree)

             1980년 5월 보제서품(보스톤 미국정교회 주교 안티모스께서 보제품성사 집전)

             1980년 7월 사제서품(뉴질랜드 대주교겸 한국정교회 대리교구장 디오니시오스 대주교

                                 께서 사제서품성사 집전)

             1980년 9월 서울 성 니콜라스 성당사제 부임

             1981년 2월 인천지역 선교 담당.

             1989년 9월 인천 성 바울로 성당 주임사제 부임

             1997년 10월 세계 정교청년협회(syndesmos) 아시아 지국장 임명

            

♣ 성당 소개

1981년 2월부터 성찬예배를 중심으로 선교가 시작된 인천 지역은 1983년 9월에 남동구 간석동427-3에 대지를 구입하여 소성당을 건립하면서 본격적인 인천 지역 선교가 전개되었다. 인천 지역 정교회는 지역 교우들의 열성과 애정으로 결속된 가족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현재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1994년 새 성당이 건립됨으로서 넓은 성당과 사제 사무실, 운영위원회 및 학생회의 각 단체 회의실이 구비되었고 교우들의 친교를 위한 장소가 마련됨으로서 지역 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성당의 지성소의 동쪽 벽면에는 그리스에서 활동중인 소피아 조와 이콘 화가 올림피아다 킬라이디가 한국적인 색채와 양식을 가미하여 제작한 성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당 건물의 1층에는 성 요한 크리스토스톰 소성당이 위치해 있다.

♣ 예배 안내

  주일 성찬예배(Divine Liturgy) : 매주일 오전 10시

  주일 조과(早課; Orthros) : 매주일 오전 9시

  축일 만과(晩課; Vesper) : 축일 오후 5시

  토요일 시과 및 대만과(大晩課; Great Vesper)  : 토요일 오후 3시

  * 이외에 축일에 따라 평일에도 수시로 성찬예배를 거행한다.


♣ 각종 단체 활동

성 바울로 성당 단체는 주일학교, 학생회, 청장년회, 부인회 및 원로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일 성찬예배 후에는 각 단체별 모임과 성경 공부가 진행되고 있다. 매주 수요일에는 부인회 및 예비신자를 위한 교리공부가 있다.


♣ 특별 단체 활동

- 매년 정기적으로 각 단체별 수련회 및 수도원 방문을 통하여 영성생활을 더욱 돈독히 하는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 청년부의 주관 하에 중 고등부를 대상으로 하는 무료 공부방이 실시되고 있다.

- 부인회 주축 하에 자선활동이 이루어지며 장래 복지관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 매월 11일은 지역주민 원로들을 위한 점심식사가 부인회 주체로 이루어 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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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한국대교구
  성 바울로 성당

30 회기
2014
년도  신도총회

 

운영위원 및 감사 명단: (임기 2014~2015)   

위원장 -    나창규 (다니엘)대신부

부위원장 - 장석준 (아포스톨로스)

총무 -       김낙환 (안드레이)
서기 -       강순배 (
하리클리아)

재무 -       나금민 (죠이)

위원 -       브라드미르 스크보르쵸브 -선교

위원 -       김찬규 (바실리오스) - 복지

위원 -       김세원 (타소) -청소년

감사 - 김태관 (알렉산드로스)

감사 - 노정애 (엘레니)

 

 

2013년도 교회 사업실적

교회 운영위원회 모임 (매월 둘째 주일):

교회행정 및 재정적 운영을 위해 토론을 거처 결의와 실행에 모두 참여함.

교회 교육 프로그램 담당 : 다니엘 대신부

교회 성사 생활 활성화: 가정 성수식, 축복식, 고백성사.

청장년회 교육 및 자체 운영 (매월 둘째 주일 - 단체장: 브라드미르 스크보르쵸브)

학생회 교육 및 자체 운영 (매월 네째 주일 - 단체장: 니콜라스 김민철)

원로회 교육 및 자체 운영(매월 첫째 주일 - 단체장: 수산나 김)

부인회 교육 및 자체 운영(매월 둘째 주일 - 단체장: 안나 유양미)

예비신자 교육 운영 (매 주일-다니엘 대신부 / 엘레니 최현진)

주일 학교 운영(매 주일 -올림피아 사모/ 엘레니 최현진)

냉담자 연락(아포스톨로스 장석준 / 바실리오스 김찬규-주보발송-)

교회 정기 행사:

주일 친교 모임 (다과 및 음료수-올림피아 사모)

노인정 식사 운영 9 주년 (매월 1회 부인회 주관운영)

정기 수도원 방문  86일 및 103

성당 명명 축일(629- 아포스톨로스 장석준)

성당 성가대 주일 및 특별 성가연습 모임 (성가대장 - 안나 유양미)

북카페 “로고스” 운영 (바실리오스 김찬규)

성당 성초제작          (바실리오스 김찬규)

성당소식난 관리 (하리클리아 강순배)

성당내외부 정돈 및 꽃장식 관리 (안나 유양미, 안드레이 김낙환, 바실리오스 김찬규)

전국 신데스모스(Syndesmos) 청년회 활동참여

교회 특별 행사:

17일 러시아 성탄절 (스라브언어) 예배및 특별 모임

에짚트 곺틱 정교회 성가대 인천 성당 공연 (12)

교회 성사:

결혼 성사: 2(코스타 나의룡 / 엘리자벹 전원선) (미론 장청오 / 스테파니아 신민희 )

세례 성사 5( 엘리자벹 전원선, 스피리돈 라리언버그, 스테파니 신민희, 넥타리아 서영자, 다니엘 나윤영)

예비신자: 7

특별 국제 회의:

기독교교회협의회회원교단장 일행과의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청 방문 (3)

평화열차 (독일-러시아-시베리아-중국 횡단 참석(10)

세계기독교교회협으회 제10차 부산총회참석 및 아시아회의 주제 발표 (1030~118)

기타:

천주교 및 개신교 신도의 인천성당 방문자와의 대화 및 친교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준비위 참석

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일치기도 모임 참석

인천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위원모임 참석 및 정교회역사 발표

 

2014 교회 사업계획

 

1) 교회 영성생활 : 다니엘 대신부

* 교회 성사 생활 활성화

* 이웃 종교 및 종단과의 유대관계

* 주일 강론 및 교회축일별 주제 발표

* 가정방문을 통한 이웃선교 (1회 모임)

2) 교회 운영회 : 운영 위원회 임원

* 운영 위원회 (매월 둘째 주일)

* 각 단체 모임 참관

* 공공 및 사설 기관 교섭 및 상호 행정 처리

3) 성서 연구반 : 다니엘 대신부

* 청년 학생회 성서 연구반  (매월 세째 주일)

* 청장년회 성서 연구반  (매월 둘째 주일)

* 원로회 성서 연구반 (매월 첫째 주일)

* 부인회 성서 연구반 (매월 네째 주일)

* 공동체의 날 (매월 다섯째 주일)

4) 교회 정기 행사

* 수도원 정기 방문  (86/ 103)

* 성당 명명 축일(629) 및 마을 축제 (가을 봄 바자회)

* 성탄절 및 부활절 특별 단체 / 개인 발표회

5) 교회 특별 행사

* 특별 강사 초빙

* 봄 가을 체육회 (청장년 및 학생회 주관)

* 자선 모금 운동 (부인회 및 청장년 학생회 주관)

* 이웃 기독교 성가대 특별 방문 공연

6) 외국어 교육 : 브라드미르 스크보르쵸브 / 엘레니 최 / 스피리돈 라이언 / 토마스 던라비

* 영어 (매 주일)

* 스라브어 (매 주일)

* 그리스어  (매주일)

7) 단체별 정기 행사 및 특별 활동

) 청년 학생회 회장- 니콜라스 김민철 / 서기- 야고보스 명제규

불우 이웃 돕기

정기 청소년 수련회 (여름 방학기간 및 분기별)

자체 월례회

교회 건물 환경 정리 (북카페 및 소성당)

성경퀴즈대회-부활절 전후 년2

부활절, 크리스마스에 카드제작 및 판매

매달 첫째주 토요일은 만과 전원 참석.

317일 성 패트릭 데이: 성당 앞에서 선교 활동

) 청장년회: 회장-브라드미르 스크보프쵸브 / 서기- 토마스 던라비

청장년회지 발간

영어 마을 크럽 (6개월)

정기 청장년 수련회 및 학생회 연합회의

자체 월례회

교회 건물 환경 정리 (성당 외부)

) 부인회 : 회장- 안나 유양미 / 서기- 엘레니 노정애

주일 친교 모임 (식사 / 다과 / 음료수)

노인정 월례 식사 운영

주방 환경 정화

축일 꽃 장식

자체 월례회 (종교서적 읽기 운동)

) 원로회 : 회장- 수잔나 김

자원 봉사 활동

자체 월례회

8) “로고스” 북 카페 : 바실리오스 김찬규 / 하리클리아 강순배

* 일일 차집 운영( 학생회주관운영)

* 성기물 및 인기 기념품 책 판매

9) 교회 출판:

* 정기소식지 발간 - 브라드미르 스크보프쵸브

* 성당 소식 안내 장식 - 하리클리아 강순배

* 교회 주보 발송 - 바실리오스 김찬규

* 교회 교육 자료집 - 다니엘 대신부

10) 교회 장학 사업 및 원로복지 기금 : 아포스톨로스 장석준

11) 교회 홍보 사업 :

* 정기발행책자

* 성당 홈페이지

* 페이스 북

* 교회 안내 소책자

12) 주일 학교 운영 : 올림피아 사모 / 엘레니 최현진 / 죠이 나금민

* 유아부

* 유년부

* 초등부

* 재능부 (매주 토요일)

13) 신자 교육 및 상담 : 다니엘 대신부 / 올림피아 사모 / 엘레니 최현진

* 초등부 및 학생회

* 청장년회

* 원로회

14) 성가대 : 안나 유양미

* 주일 성가 연습

* 정기 특별 성가 발표회

* 성가대원 육성

* 가정 및 병원 방문

15) 복사단 : 복사장 ( 야고보스 명제규 / 니콜라스 김민철 )

* 대성당 및 소성당 지정소 정리

* 4분기별 특별 교육

* 계절별 복사복 착용

16)  건물 및 주변 정리 관리자:  바실리오스 김찬규 / 엘레니 유 / 안나 유양미 / 안드레이 김낙환

* 청년 학생회 담당구역 (북카페 및 소성당)

* 청장년회 담당구역 (성당 외부)

* 부인회 담당구역 (성당 내부, 사제 집무실 및 주방)

17) 성당 예배 안내 봉사자 운영

* 주기적 교육으로 예배 안내봉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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